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례문 방화 사건 (문단 편집) == 복구 ==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한 2층과 달리 1층 누각은 전부 불탔을지언정 상당 부분이 구조를 유지[*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게 2층은 10% 가량이, 1층은 절반 이상이 남았다. 다만 2층의 붕괴 및 화재의 열, 그리고 진화 과정에서의 피해로 안전상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부재는 제한적이었다.]하고 있었다는 점과 숭례문 안에 있던 가치 있는 문화재의 상당수는 [[1960년대]]에 해체, 보수할 때 꺼내서 누각 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서 무사하다는 점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숭례문 현판.jpg|width=100%]]}}} || || {{{#fff '''붕괴 이후의 현판 모습'''}}} ||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진 현판은 떼낼 시간이 없어서 연결 부분을 톱으로 절단하여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간 파손되긴 했지만 지켜냈다. 현판을 떼어낼 당시 조심스럽게 떼지 않고 바닥에 떨어뜨려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현판의 엄청난 무게로 인해 몇몇 사람의 힘으로는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완성된 현판의 크기는 건장한 성인 남성보다 클 뿐더러 무게도 150kg을 우습게 넘긴다. 더구나 현판이 붙어 있는 2층이 불타고 있었으니 제대로 현판을 분리할 준비를 할 여유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음이 알려졌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coolerjeon&logNo=10027414795|(블로그 글)]] 복구까지는 짧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로 예상되었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을 보수하느라 목재로 사용 가능한 정도의 수령(樹齡)이 된 여분의 한국산 소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건축에 쓰이는 목재는 크기가 적당한 나무도 있어야 하지만 벌목 후 수년 동안 건조를 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조달할 수 없다. 그래서 광화문을 다 분해해 놓은 상태에서 거기에 쓰일 목재를 숭례문으로 돌려서 썼다고 한다. 목재가 부족한 이유는 [[6.25 전쟁]] 때문에 한국에서 목재로 쓰일 만한 소나무 씨가 말라 버려서이다. 다행스럽게도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5대조가 안장된 준경묘(濬慶墓) 경역의 금강송 20그루를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사용하는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동의해 이를 벌채한 것[* 벌목 하기 전에 벌목자가 '어명이요!'라고 외치고 벌목을 시작하였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404150|기사]]]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소나무를 기증하겠다는 고마운 시민들 덕에 재목 충당에는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한편 자재를 뺏긴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이 먼저 복원되었다는 점이 미스터리로 얘기가 간간이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